순수한 헌신과 유대감으로 시민 사회를 지키는 사람들

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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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4321

'목포의 어머니'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여사 30여년간 고아원 운영하며 전쟁고아 3000여 명 길러내
아들 윤기 씨는 어머니 뜻 이어 재일교포 위한 노인복지시설 5곳 운영하며 무연고자 장례까지 도맡아 치뤄
한일 해상 페리 운영하는 부산의 해상수송회사, 무연고자 재일교포 사망자 안식처 될 납골함 5톤 수송 맡아
김현옥 전 부산시장, 부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일본인 유골 모아 위령비 세우고 시립공원묘지에 봉안실 마련
2001년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 추락한 일본인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 씨,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큰 감동 남겨
건전한 시민사회는 사심 없이 헌신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유대감을 갖는 속에 지켜지고 성장해 나갈 수 있어

‘목포의 어머니’로 불린 일본인 여성에 대해 이전 이 코너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한국인 남편을 둔 일본인 여성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봉사’(2020.09. 11)). 전라남도 목포에서 30 년 넘게 고아원 (목포공생원)을 운영하며 1968년 생을 마칠 때까지 3000여 명의 한국인 고아들을 길러낸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 여사.

다우치 여사의 아들 윤기 씨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역시 50년이 넘도록 한국에서 보육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올해 80세가 되는 공생복지재단 윤 회장이 새롭게 힘을 쏟고 있는 일은 재일교포 1세들에 대한 복지사업이다. 치즈코 여사가 숨을 거두기 전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였다고 한다. 그때까지 김치를 먹고 한글을 쓰며 살아온 어머니의 마지막 말에 윤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강하고 꼿꼿했던 어머니시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고국과 고향을 떠올리며 그리워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회장은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가슴에 새기고, 연로하신 한국인 1세 어르신들께 '김치'를 맛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조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살고 있는 재일교포 분들이 고향의 온기를 느끼며 지낼 수 있는 요양시설을 짓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시설을 열기까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현재 일본에 5곳의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설에서 돌아가셨지만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 22분의 유골을 자택에 안치하여 모시고 있다.

그의 꿈은 한국에서 납골함을 들여와 오사카에 있는 복지시설 안에다 평생 고향을 그리다 돌아가신 분들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평화와 기도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다. 실현을 위해 가장 어려운 일이 총중량 5톤이 넘는 도자기 납골함 등의 수송이다. 하지만 다행히 부산에 있는 해상수송회사인 P사가 지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부산과 오사카를 연결하는 해상수송항로는 조선통신사도 이용한 역사가 있다. P사는 이 항로에서 페리를 운항하고 있으며,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부산시민들이 모은 구호물자를 컨테이너선으로 일본까지 수송한 실적이 있다. 망향(望鄕)의 납골함은 10월하순 부산항에서 오사카항으로 출항할 예정이다.

부산광역시 북동부에 위치한 시립공원묘지 내에는 일본인 위령비와 위패 봉안실이 마련되어 있다. 1962년 당시 김현옥 부산시장은 부산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본인의 유골 등을 모아 당감동에 비석을 세웠다. 그 후 도시개발로 인해 시립공원묘지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 시장은 서울특별시장도 역임했는데, 서울에서도 일본인 위령비 건립에 관여했었다. 고인이 되셨지만 국적을 따지지 않고 진혼을 위해 애쓰신 그의 마음에 감사의 말을 이루 다 할 수가 없다.

일본인 위령비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의인 고 이수현 씨의 묘지가 있다. 고 이수현 씨는 2001년 1월,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 카메라맨과 함께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려다 열차에 치여 희생되셨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한국과 일본의 가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일본에 유학을 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용감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지금도 한국과 일본에서 그를 기리는 시민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신오쿠보역 승강장과 개찰구 사이 계단 벽면에는 당시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현판이 마련 되어 있다.

사고 후 위험을 무릅쓴 그의 의로운 행동에 감동한 많은 분들이 고 이수현 씨의 부친 이성대 선생님께 조의금을 보내왔다. 아들의 삶과 사람들의 선의가 헛되지 않도록 조의금은 아들처럼 일본어를 공부하는 유학생을 위해서 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셨다. 이성대 선생님께서 내신 기부금과 조의금을 바탕으로 하여 아시아에서 온 유학생을 지원하는 장학회가 설립되었다. 이 장학회는 이수현(Lee Soo Hyun) 씨의 영문 앞글자를 따 'LSH 아시아 장학회'라 이름지었다. 지금까지 1000명이 넘는 일본어를 공부하는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성대 선생님께서는 아들의 뜻을 이어 20년 가까이 한일 간 시민교류 증진을 위해 힘을 쏟으시다 안타깝게 재작년에 아드님 곁으로 떠 나셨다. 아버님의 온화하신 미소와 말투, 그리고 그 분의 헌신을 필자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최근 코로나 19 감염증에 의한 팬데믹,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을 시도하는 국가등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일들은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런 가운 데서도 어머니의 뜻을 이어가는 아들, 고인을 기리고 평안을 기원하는 사람들, 본인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은 청년, 아들의 뜻을 이어가는 아버지 등, 우리 주변에는 이런 훌륭한 사람들에 의한 활동이 줄기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 단체, 기업도 건재하다. 건전한 시민사회는 사심이 없는 순수한 헌신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유대감으로 지켜지고 보호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