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갈등을 화해와 통일로 승화시킨 진정한 지도자,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을 생각한다
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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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11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재임과 퇴임 후 두차례 한국 방문 인연
인종차별 반대하며 무장투쟁까지 감행, 27년간의 옥중에서도 투쟁
석방 후엔 민족 화합을 위해 혼신의 힘 쏟아 현재 남아공 기틀 다져
백인 주축 남아공 럭비팀 우승 스토리 영화 '인빅터스'로 만들어지기도
한국과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생전의 만델라 대통령은 재임하던 1995년과 퇴임 후인 2001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기간 그는 국회 연설, 대학 방문, 그리고 각계 각층의 대표를 초대한 만찬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당시 남산타워 (현재 서울타워) 지하층에는 지구촌 박물관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만델라 대통령의 등신대 인형과 그의 일대기에 관한 전시를 본 기억이 있다.
htt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11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재임과 퇴임 후 두차례 한국 방문 인연
인종차별 반대하며 무장투쟁까지 감행, 27년간의 옥중에서도 투쟁
석방 후엔 민족 화합을 위해 혼신의 힘 쏟아 현재 남아공 기틀 다져
백인 주축 남아공 럭비팀 우승 스토리 영화 '인빅터스'로 만들어지기도
한국과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생전의 만델라 대통령은 재임하던 1995년과 퇴임 후인 2001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기간 그는 국회 연설, 대학 방문, 그리고 각계 각층의 대표를 초대한 만찬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당시 남산타워 (현재 서울타워) 지하층에는 지구촌 박물관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만델라 대통령의 등신대 인형과 그의 일대기에 관한 전시를 본 기억이 있다.
나는 3년간 서울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2004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재외 공관으로 부임했다. 그 당시 만델라 대통령은 고향인 ‘쿠누'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남아프리카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압도적인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마디바'라는 애칭으로 친숙했던 그의 명망은 여전했다. 2013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디바'의 말 한마디는 남아프리카의 어느 인사의 발언보다도 존중을 받았다.
만델라 대통령의 인생과 위업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인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그는 27년간의 긴 옥중생활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생을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투사로서 투쟁했다. 석방된 후에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의장으로, 나아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모든 민족의 화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이것이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있게 한 근간이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아프리카의 역사는 참으로 복잡하다. 인류의 발상지라고 불리며, 기후가 온난하고 자연과 자원이 풍요로웠던 남아프리카 땅으로 태고 적부터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유입되어 왔다. ‘산족', ‘코이코이족'은 기원 전부터 거주하고 있었고, 기원 후에는 수백 년에 걸쳐 적도 부근으로부터 ‘줄루족', ‘코사족'이라는 ‘반투계어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희망봉을 중심으로 하는 케이프 지역에 네덜란드로부터 이주해온 ‘보어인'이 증가하였고, 훗날 ‘컬러드'라고 불리는 혼혈인들도 늘어났다. 18세기 말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찾아 많은 영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케이프 식민지는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양되었다. 보어인은 아프리카 원주민과 싸우면서 차츰 내륙부로 진출해, 나탈 공화국, 트란스발 주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등으로 구성된 ‘보어 공화국'을 세웠다.
그 후, 보어 공화국과 영국과의 전쟁(보어 전쟁), 아프리카 원주민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줄루 전쟁)을 거치며, 1910년에는 대영제국 내에 보어인의 자치령인 남 아프리카 연방이 수립되었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쿠누 지역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 2차 대전 후, 남아프리카 연방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영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난하자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 연방에서 탈퇴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세웠다.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불굴의 투사였으며,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무장투쟁 활동까지도 전개하며 싸웠다. 옥중에 있어도 그는 여전히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가 변하게 되고 1990년에 만델라는 드디어 석방된다. 그리고 그는 백인 집권당인 국민당과 협상하여 1991년에는 아파르트 헤이트 관련법을 폐지시켰고, 그 후에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선거를 실시하여 신헌법 제정으로의 길을 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1993년에 국민당 소속인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인종과 민족간의 갈등과 항쟁으로 고통받아 온 남아프리카에서 억압과 원한의 고리를 끊는 일은 모든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었으나, 이를 실현시키는데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만델라는 이런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마침내 모든 민족의 화합을 위한 만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는 피억압층의 상징으로 투쟁해 온 만델라 자신이 남아프리카의 모든 인종과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어 온 국민을 이끈 점을 가장 큰 위대함으로 꼽는다.
만델라는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상 최초로 모든 인종들이 참가하여 실시한 총선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6년에 새로 제정한 헌법으로 남아프리카 내의 인종과 민족이 사용하는 11개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으며, 대통령 취임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든 민족의 화합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며 힘썼다. 1995년에 럭비 월드컵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개최되었는데, 만델라 대통령은 선수 대다수가 백인으로 구성된 자국 팀 ‘스프링복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결승전에서 스프링복스는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뉴질랜드 팀을 꺾고 우승하였다. 이 일화는 2009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 의해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Invictus)'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만델라 대통령은 옥중에서 영국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의 시'Invictus'를 즐겨 읊으며, 이 시를 자신의 정신적 바탕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시 'Invictus'의 마지막 구절은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로 끝난다.
만델라 대통령의 인생과 위업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인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그는 27년간의 긴 옥중생활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생을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투사로서 투쟁했다. 석방된 후에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의장으로, 나아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모든 민족의 화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이것이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있게 한 근간이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아프리카의 역사는 참으로 복잡하다. 인류의 발상지라고 불리며, 기후가 온난하고 자연과 자원이 풍요로웠던 남아프리카 땅으로 태고 적부터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유입되어 왔다. ‘산족', ‘코이코이족'은 기원 전부터 거주하고 있었고, 기원 후에는 수백 년에 걸쳐 적도 부근으로부터 ‘줄루족', ‘코사족'이라는 ‘반투계어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희망봉을 중심으로 하는 케이프 지역에 네덜란드로부터 이주해온 ‘보어인'이 증가하였고, 훗날 ‘컬러드'라고 불리는 혼혈인들도 늘어났다. 18세기 말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찾아 많은 영국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케이프 식민지는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양되었다. 보어인은 아프리카 원주민과 싸우면서 차츰 내륙부로 진출해, 나탈 공화국, 트란스발 주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등으로 구성된 ‘보어 공화국'을 세웠다.
그 후, 보어 공화국과 영국과의 전쟁(보어 전쟁), 아프리카 원주민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줄루 전쟁)을 거치며, 1910년에는 대영제국 내에 보어인의 자치령인 남 아프리카 연방이 수립되었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쿠누 지역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 2차 대전 후, 남아프리카 연방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영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난하자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 연방에서 탈퇴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세웠다.
넬슨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불굴의 투사였으며,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무장투쟁 활동까지도 전개하며 싸웠다. 옥중에 있어도 그는 여전히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가 변하게 되고 1990년에 만델라는 드디어 석방된다. 그리고 그는 백인 집권당인 국민당과 협상하여 1991년에는 아파르트 헤이트 관련법을 폐지시켰고, 그 후에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선거를 실시하여 신헌법 제정으로의 길을 열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1993년에 국민당 소속인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인종과 민족간의 갈등과 항쟁으로 고통받아 온 남아프리카에서 억압과 원한의 고리를 끊는 일은 모든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었으나, 이를 실현시키는데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만델라는 이런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마침내 모든 민족의 화합을 위한 만민의 지도자가 되었다. 나는 피억압층의 상징으로 투쟁해 온 만델라 자신이 남아프리카의 모든 인종과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되어 온 국민을 이끈 점을 가장 큰 위대함으로 꼽는다.
만델라는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상 최초로 모든 인종들이 참가하여 실시한 총선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6년에 새로 제정한 헌법으로 남아프리카 내의 인종과 민족이 사용하는 11개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으며, 대통령 취임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든 민족의 화합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며 힘썼다. 1995년에 럭비 월드컵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개최되었는데, 만델라 대통령은 선수 대다수가 백인으로 구성된 자국 팀 ‘스프링복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결승전에서 스프링복스는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뉴질랜드 팀을 꺾고 우승하였다. 이 일화는 2009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 의해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Invictus)'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만델라 대통령은 옥중에서 영국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의 시'Invictus'를 즐겨 읊으며, 이 시를 자신의 정신적 바탕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시 'Invictus'의 마지막 구절은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