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에 속삭이는 1월의 햇발같이(대학부 대상작)

2021/5/10
<대학부 대상작> 
돌담에 속삭이는 1월의 햇발같이
 전형록(경북대학교)
 
햇살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나
언젠가 갔던 제주도에는 나지막한 돌담들이 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는 현무암 담 뒤로는 따뜻하다 못해 찬란하게 반짝거리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는데 그 따스함 속에서 나는 문득 시인 김영랑의 시 한 편을 떠올렸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러움같이/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햇살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나. 그 질문에 대한 어렴풋한 답이 저 시에는 있다. 돌담에 ‘속삭이듯’ 다가오는 햇발은 어느새 고운 봄길을 만들어 낸다.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스며들었지만 어느덧 온 세상을 따뜻함으로 적시는 것, 그것이 햇살의 작동 양식이다. 우리가 잘 아는 지명 ‘밀양(密陽)’ 또한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려준다. 햇살(陽)은 어느덧 ‘빽빽하게(密)’ 우리를 환하게 물들이고 있지만, 사실 이미 ‘은밀하게(密)’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내리쬐고 있었던 것이다.
꼭 이 햇살과도 같은 삶을 살다 간 청년이 있다. 어느덧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따뜻하고 감동적인 영혼으로 세상을 적신 청년. 조용하고도 나지막하게, 그러나 누구보다도 강하고 뜨겁게. 1월의 햇살, 이수현이다.
 
급격한 변화와 혐오의 시대에서 이수현을 읽기
2020년대라는 숫자의 변화와 함께 우리를 찾아온 것은, 단순히 무지막지한 전염병이 아니라,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과 그 속도에 올라타야만 한다는 조급함이었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단결과 화합 같은 단어들은 이미 속도의 저편에 던져두고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과 이기심, 집단 간의 갈등, 타인에 대한 혐오를 동반한 조급함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나의 뒤로 밀어내며 올라서야 한다고 강요받았고, 그렇게 속도와 단순한 몇몇 목표에 대한 집중이 이 변화에 대한 대항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치 이 속도에 대해 비웃기라도 하듯, 이수현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린 시절부터 매사 고집스럽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그의 성격은 오히려 잘못되고 무언가 나사가 빠져 돌아가는 광경을 그냥 놓치고 지나가지 않게 만들었다. 무엇인가를 배우는 일은 또 어떤가. 고집스럽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독학에 대한 고집은 세상의 일을 그저 편의와 안락함에 맡겨버리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과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게 했다. 삶의 밀도를 차곡차곡 높여가던 그의 성장기는 속도가 이뤄낼 수 없는 삶의 다른 측면에서의 성장을 해나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단순히 의지와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성장뿐 아니라, 이수현은 직접 땀 흘려 몸을 움직이는 것의 가치를 잘 아는 청년이었다. 그는 기타 연주에 몰입하여 선율과 리듬을 창조해내는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었고,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도 자전거 페달을 굴려가며 더 넓은 세상과 사람들을 만났으며, 등산과 수영을 하며 수직의 세상을 오르내리고 수평의 세상을 헤엄쳐나갔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이 이루어내는 균형잡힌 발걸음 속에 속도에 대한 강박과 타인에 대한 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오직 자신의 점진적인 성장에 대한 확신, 타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이수현의 성장 과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그의 친구인 성훈 씨가 말한 것처럼, 이수현이라는 친구는 친구들에게는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였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당신들의 자식이었다. 그가 타국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온몸으로 자신을 내준 이였다는 사실 이전에, 청년 이수현은 한 사람의 젊은이였다. 그리고 이 젊은이는 어떠한 특별함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정도 위에서 남을 품고 올바른 것에 기대가며 성장해왔다는 그 사실로 우리에게 급격한 변화와 혐오의 시대에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모든 성장의 순간을 밑바탕으로 하여, 이수현이라는 청년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한 모습이 2001년의 신쿠오보역 한가운데 피어난 것이다. 누군가는 무모하다고도, 누군가는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 이 일은, 갑작스럽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연 같은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치열하게 묻고 성장하며 살아왔던 청년 이수현이 피워낼 수 있었던 필연적인 사랑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1년의 한일, 그리고 2021년의 한일
2001년 이수현이 피워낸 사랑의 한복판에는 오래고도 미묘한 관계가 한 꺼풀 더 덮여 있는데, 바로 한국과 일본이다. 이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한 인류적 차원의 일로서 생각되어야 하겠지만, 그 속에는 한국인이 일본에서 한 사람의 일본인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적 차원의 프레임은 또 다른 질문과 과제 하나를 우리에게 남겨둔다.
2001년의 한일은 마치 이수현의 생전 바람처럼 2002년 한일 월드컵과 한류 열풍으로 관계의 회복과 봉합이라는 기치 아래 수많은 시간을 지내왔다. 발전된 문화교류와 양국 간의 개방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화합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으며,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과 관계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한일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힘이 되고 싶다.’던 이수현의 뜻이 다양한 방향으로 퍼져나갈 수 있던 시간을 한일 양국은 함께 지내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 화합의 뜻이 어디로 갔는지, 사랑하며 함께 나아가자던 그 의지가 어디로 갔는지 2021년의 한일관계는 반문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도 극해진 진영논리와 편가르기 속에 한 민족 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인 인종문제, 혐오와 차별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너무도 안타깝고 처절할 정도로 슬픈 상황이다.
아득하고도 멀어 보였던 답이 때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듯이, 2001년의 이수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질문뿐 아니라 답에 가까운 과제 한 가지 또한 남겨두었다. 앞서 수현의 일화는 인류로서의 사건 위에 국가적 차원의 한 꺼풀이 덮여져 있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과제를 볼 수 있도록 잠시 이 이불을 들춰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일은 때로는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현의 사건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초점을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그 순간, ‘내’가 한국인이고, ‘네’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나도 처절하게 느꼈던 아픔이 곧 ‘네’가 느낄 수 있는 아픔이 되는 것이고, 그 오랜 시간 전의 ‘내’ 이야기가 곧 ‘네’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섬뜩한 깨달음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이 함께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고도 관심 없는 주체지만, 그것이 타인이 아니라 그냥 인간과 삶이라는 내 존재 자체의 이야기로 들어온다면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2021년의 한일 양국은 하나의 국가 주체이기도 하지만, 그 구조적인 이불 밑에 덮인 우리는 전부 같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나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속에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모두 담겨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 1월의 햇발같이
묵묵히 지나온 20년을 돌아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주변은 햇살로 가득 차 있다. 2001년 1월의 햇살은,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2021년의 햇살로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는 것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던 그 마음은 아마 이수현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는 그 햇살처럼 수현의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깊은 감동을 준다. 그 온기와 찬란하게 빛나는 저 빛이 지난 20년을 환하게 비춰왔듯, 우리의 앞으로의 나날들도 빛낼 수 있기를, 수현의 이야기를 읽으며 전심으로 함께 소망해 본다.